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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국산화'의 시대로? 기로에 선 국가R&D 전략


일본발 무역전쟁으로 소재국산화 총력전, R&D전략도 전환하나?

[아이뉴스24 최상국 기자] 다시 '국산화'가 화두다. 2000년대 초반 이후로 국가 R&D 전략에서 점차 사라지다시피 했던 '국산화'라는 키워드가 일본에서 촉발한 무역분쟁 태풍 속에 다시 국가 핵심 전략의 하나로 떠올랐다.

7월1일 일본 정부가 반도체·디스플레이 3개 소재에 대한 수출규제를 선언한 이후 한 달 동안 사태파악과 대응책 마련에 분주했던 정부는 8월2일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는 결정을 내린 직후부터 연일 대책을 쏟아내고 있다.

2일 '일본 정부의 백색국가 배제 등 수출규제 및 보복조치 관련 종합 대응계획'을 발표한 정부는 5일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대책'을 통해 예산, 세제, 금융, R&D, 국제공조, 법령개정, 거버넌스 구축, 산업육성, 규제특례를 망라한 종합대책을 내놓았다. 특히 R&D정책은 별도의 대책을 마련해 8월말까지 발표하겠다고 예고한 상태다.

정부가 강력한 의지를 천명하자 국가 R&D의 중심축인 대학, 연구소도 나섰다. KAIST와 서울대가 5일과 7일 각각 일본 수출 규제에 대응해 기업을 지원하기 위한 '전담반'을 운영한다고 발표했다. 소재 관련 정부출연연구소들도 긴급 대응전략 마련에 부산한 모습이다.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토론회도 연일 열리고 있다. 1일에는 국책연구소를 관할하는 양대 기관인 국가과학기술연구회와 경제인문사회연구회가, 7일에는 과총과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한국공학한림원이 주최하는 토론회가 열렸다. 국회에서, 연구단지에서, 학교에서 크고 작은 세미나가 열려 '이번 기회에', '이번에야말로', 확실한 '소재 국산화'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일본 수출규제 대응방안 주제 긴급 토론회가 7일 서울 양재동 엘타워에서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한국공학한림원,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주최로 열렸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제공]
일본 수출규제 대응방안 주제 긴급 토론회가 7일 서울 양재동 엘타워에서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한국공학한림원,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주최로 열렸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제공]

옳고 그르고를 떠나 일단 어리둥절하다. "이제는 7월1일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한 토론자의 말처럼 7월1일 이전에는 이런 분위기는 예측할 수 없던 현상이다. 단기간이 아니라 아주 오랫동안 '국산화'는 촌스러운 단어로 취급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

무려 476쪽에 이르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2019년 성과관리시행계획'에도 '국산화'는 단 두 곳에서만 등장한다. '우주개발'과 '연구장비' 항목에서다. 대신 '자율', '창의', '혁신', '선도', '도전' 등의 단어들은 인기 키워드다. '추격형', '패스트 팔로워' 전략은 빨리 버려야 할 정책이었고 '선도형', '퍼스트 무버'는 최근 몇 년동안 지겹도록 접해야 하는 유행어였다.

그런데, 다시 '국산화'다. '국산화'는 그토록 버려야 할 '추격형' 연구개발의 대명사 아니었던가?

다시 뜨는 키워드 '국산화' [구글트렌드]
다시 뜨는 키워드 '국산화' [구글트렌드]

7일 과총과 한림원 주최 토론회에서도 지적되었지만, 2000년대 이후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국가 R&D 전략에서 대기업은 의도적으로 배제돼 왔다. "대기업이 알아서 잘 하는 분야에 국가 예산을 지원하는 것"은 금기시됐다. 대신 수월성보다는 형평성이, 선택과 집중보다는 균형발전이, 상업성보다는 공공성이 강조돼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정부의 8·5 대책에는 그동안 산업계가 줄기차게 반대해도 정부는 끈질기게 추진해 온 각종 규제들의 완화책들이 총망라됐다. 주52시간 근무제, 화평법, 화관법, 예타면제, 대기업 참여 제한 사업에 대한 예외 허용, 수도권 산단물량 우선배정, 일몰법의 상시법 전환, 해외기업 인수까지 금융지원 확대 등등 어지러울 정도의 대책이 쏟아졌다.

일본의 단기적인 무역보복 차원이든 중장기적인 보호무역주의 강화 추세로 인한 것이든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다는 방증이지만, 정부와 공공섹터의 급작스러운 '태세전환'은 여러가지 궁금증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정부는 정말 정책기조를 전환한 것일까? 정부의 대책에 진정성은 얼마나 담겼을까? 내놓은 대책들은 실효성이 있을까? 과연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는 한 걸까?

유영민 과기정통부 장관은 지난 5일 합동브리핑에서 R&D예산 배분전략의 전환을 시사했다. "그동안은 예산 배분이 산발적으로 이뤄졌는데 이제는 우선순위를 따져서 상당히 전략적으로 재구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소재 국책연구기관의 한 간부는 "해묵은 국가 R&D 시스템의 문제들을 해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주장했다. 그는 "사실 선도형 R&D라는 게 더이상 추격할 게 없는 데서나 할 수 있는 얘기지 추격할 게 이렇게나 많이 남아있는데 선도형 하겠다는 것은 사치"라면서 "성과 없이 겉치레나 하고, 산업계와 연계없이 논문만 쓰고, 의욕 부리다 감사 빌미 주느니 성과지표 맞춰서 따박따박 연구비 타먹어 온 풍토"를 이번 일을 계기로 송두리째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7일 토론회에서 패널로 참석한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회장은 이번 사태가 국가적 위기상황임을 강조했다. 그는 "한국이 망하느냐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하느냐 갈림길에 있는 심각한 상황이다. 전쟁이 터졌다. 전쟁이 났으면 이겨야 한다. 혁신을 하려면 다같이 리스크를 져야 한다."면서 "하고 싶은 과학기술과 해야 하는 과학기술을 구분해서 선택과 집중을 해달라"고 강력한 국가주도적 국산화 대책을 주문했다.

박영수 솔브레인 부사장은 "이번의 국산화는 과거의 국산화와 다르다"고 주장했다. 초격차를 추구하는 세계 1위 산업에 단순히 국산품 사용을 강제할 수 없기 때문에 "이번 국산화는 2류 제품이지만 국산품이니까 써야한다는 과거의 국산화가 아니라 세계 1위 제품을 개발하는 국산화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소재 국산화'에 총력을 기울이자는 이런 분위기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대덕연구단지 정부출연연구소의 한 연구책임자는 "국산화, 국가주도 같은 구호에 은근슬쩍 딸려 오는 케케묵은 아젠다들"을 경계했다. 그는 "국가R&D 시스템의 혁신 필요성이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은 20세기의 국가주도적, 수출중심, 대기업 중심의 가치 외에 공정성, 형평성, 다양성 등 다른 사회적 가치들도 함께 공감대를 넓혀 온 시대"라면서 급작스러운 방향전환의 부작용을 우려했다.

정부대책의 실효성은 또 다른 문제다. '핵심품목에 대해 7년간 약 7조8천억원 이상의 대규모 R&D 투자'를 한다는 '예산대책'만 봐도 그렇다. 정부가 거론한 7조8천억원에 포함된 사업들은 일본의 수출규제와 상관없이 모두 기존에 수립돼 있던 내용에 다름아니다.

1조원짜리 '차세대지능형반도체개발사업'과 5천281억원의 '디스플레이혁신공정개발사업', 4천억원이 투입될 '나노‧미래소재원천기술개발사업'은 이미 예비타당성조사를 거쳐 내년부터 예산집행이 확정된 사업이었고, 5조원짜리 '소재산업혁신기술개발사업'과 8천억원짜리 '제조장비시스템개발사업'은 현재 예타가 진행중인 사업인데 예타를 면제하겠다는 게 대책의 골자다. 요즘 예타가 평균 6개월정도 걸리는 것을 감안하면 사업개시를 빨라봐야 6개월 정도 당기겠다는 얘기다. 10년짜리 장기 연구개발사업의 시작을 반 년 앞당긴다고 문제가 해결될지, 예타를 통과한 사업들도 정부의 계획안이 부실하다는 평가와 함께 30%이상씩 예산이 깎이면서 겨우 통과한 사업들인데 예타면제가 반드시 옳은 일인지 같은 의문도 따라붙는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연구현장의 반응도 혼란스럽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소재 국산화 전략에 숟가락 얹는 분위기가 감지되는 한편으로, 정부의 단기 대책 남발이 구조적 변화를 이끌어내기는 커녕 다시 대기업 배만 불리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우려가 동시에 나온다.

대학은 이미 (산업계 수요와 동떨어진) 논문양산 중심의 생태계가 형성된 지 오래고 정부출연연구소는 PBS와 예산정원제한, 평가 및 감사제도에 찌든지 20년이다. 중소기업 R&D의 첨병 역할을 해 왔던 전문연구요원 제도는 축소논란에 휩싸여 있고 국제 과학올림피아드 우승을 알리는 기사에는 "그래봤자 다 의대가겠지"라는 댓글이 현실을 일깨워준다. 사회가 필요한 곳에 자연스럽게 인재가 공급되는 인재양성 생태계가 무너져 있는 상황에서는 백약이 무효라는 얘기다.

국책연구기관의 브레인들은 "국가 R&D 생태계의 근본적인 변화를 끌어낼 수 있는 실효성 있는 정책수립과 이를 끌고 갈 수 있는 리더십의 중요성"을 입모아 강조하지만 그게 어떻게 가능할지 자신있게 방법을 제시하는 이는 드물다.

7일 토론회에 참석한 김성수 과학기술혁신본부장, 류광준 과학기술정책국장 등 혁신본부 간부들은 네시간 가까이 진행된 토론회의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만큼 고민이 깊다는 얘기다. 김성수 본부장은 토론회 축사에서 "화학연구원에서 30년을 일한 연구자로서 이런 상황을 맞게 된 것에 대해 상당히 송구스럽다"고 말하고 토론회 마무리 발언에서는 "이 달 말 과기관계장관회의에서 발표할 R&D 종합대책을 통해 이번 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안을 내놓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정부가 어떤 해법을 내놓을지 주목된다.

최상국 기자 skchoi@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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