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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봉준호의 '영화 같은' 복수


[아이뉴스24 조석근 기자] "어렸을 적 제가 영화를 공부할 때 항상 가슴에 새겼던 말이 있습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그 말씀을 하셨던 분은 바로 우리들의 위대한, 마틴 스코세이지입니다(That quote was from, our great Martin Scorsese)." -봉준호 감독, 제92회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 소감 중.

아카데미의 여운이 도무지 가시질 않는다. 마틴 스코세이지는 이탈리아 이민자의 아들이다. 태생이 아웃사이더다. 1942년생 77세 스코세이지가 어린 시절을 보낸 미국 뉴욕의 빈민가는 갱스터들의 주무대였다. 가난과 사회적 억압 속에서 폭력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가는 아웃사이더들의 일상은 스코세이지의 영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키워드다.

'비열한 거리', '택시 드라이버', '성난 황소'로 이어지는 초기작부터 '갱스 오브 뉴욕', '디파티드', 그리고 이번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10개 부문 후보작에 오른 '아이리시맨'까지. 세계 영화팬들 그리고 영화인들은 스코세이지의 독특한 리얼리즘과 블랙 코미디, 폭력의 미학에 사로잡혔다. 스코세이지는 미국 헐리우드를 비롯해 세계 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거장이다.

봉준호 감독이 지난 9일(현지시간)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수상소감을 발표하고 있다.  [뉴시스]
봉준호 감독이 지난 9일(현지시간)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수상소감을 발표하고 있다. [뉴시스]

봉준호는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 소감 중 어린 시절부터 스코세이지의 열렬한 팬이자 헐리우드 키드였음을 고백했다. 그리고 최대 경쟁작 '아이리시맨'의 감독으로서 '우리들의 위대한 스코세이지'라고 호명했다. 너와 나를 넘어 바로 '우리'다. 이게 중요하다. '우리' 사이에선 1인치 자막의 장벽을 넘어선, 영화만이 공통의 언어다.

국경과 인종은 물론 그 어떤 차별과 배제도 불필요하다. 스코세이지 같은 거장을 동경하는, 영화인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아카데미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미국만이 아닌 세계인의 영화제여야 한다고 새삼 환기시킨 수상 소감이다.

국내에선 영화는 물론 문화계 전반을 겨냥한 차별과 배제, 그리고 억압의 쓰라린 경험이 있다. 정치적 성향이 '좌파적'이라는 이유로, 세월호 사태에 입장을 표명했다는 이유로, 특정 정치인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무려 1만여명의 문화계 인사들을 표적으로 삼았다. 청와대 이하 정부 부처들이 마치 대통령 공약이라도 되는양 일사분란하게 수행한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업이 그런 것이다.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누군가는 방송에서 퇴출되고 부당한 사찰과 함께 직책에서 쫓겨났다. 정책 지원에서 배제되는 것은 물론 콘텐츠 기획 단계에서부터 집요한 압력이 가해지기도 했다. 봉준호가 그 대상 중 한 명이었다.

표현과 창작의 자유는 대한민국 헌법상 기본권이다. 그것을 누리되, 권력을 틀어쥔 누군가의 심기를 절대 거스르지 말라는 게 블랙리스트의 취지다. 문화계 인사는 물론 국민 일반을 한낱 지배의 대상으로 여긴 인식이다. 반문해 볼 수밖에 없다. 지금이 조선총독부가 지배하는 일제 치하인가. 아니면 우리가 신분제 밑바닥을 이루는 노비나 천민인가.

봉준호와 '기생충'의 아카데미 4관왕 수상은 이 말도 안 되는 블랙리스트를 향한 마치 영화 같은 복수다.

블랙리스트 주범들에 대한 재판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아직 끝난 사건이 아니다. 사법부가 어떤 결론에 도달할진 아직 모른다. 그러나 봉준호와 '기생충'의 아카데미 수상이 회자될 때마다 블랙리스트 사건도 그림자처럼 따라다닐 것이다. 차별과 배제는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한다.

조석근 기자 mysun@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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