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이균성 기자] 2003년에 기업 B로부터 프로젝트 하나를 수주한 바 있다. 중국 현지 취재를 통해 ‘조선족 경제’에 관한 책 한 권 분량의 리포트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이 기업은 중국에서 휴대폰 제조업을 하고 싶어 했다. 한국과 중국이 수교한 지 1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1992년 한중 수교 이래 적잖은 기업이 중국으로 달려갔지만 ‘죽의 장막’은 너무 두터워서 그때만 해도 중국을 잘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길지 않은 중국 취재였지만 강렬한 느낌이 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중 수교가 한국과 중국의 미래를 바꾸어 놓을 것이라는. 한국의 기술 자본과 중국 노동력의 만남은 필연에 가까워 보였다. 지리적으로 가깝고 서로 보완적이기 때문이다. 두 나라 경제에 이로울 수밖에 없는 일로 보였다. 그 느낌은 대체로 맞았다. 30년간 한국 경제도 크게 성장했고, 중국도 미국이 가장 무서워하는 나라가 됐다.

한중 수교 30주년인 2022년을 기준으로 양국의 교역량은 1992년과 견주어 48배 급증한 3073억 달러에 달했다. 한국의 대중국 투자는 1529억 달러로 같은 기간 61배 늘어났다. 한국이 수출하는 물량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2.8%로 2위인 미국 14.6%보다 훨씬 많았다. 두 나라 교역량이 이렇게 급증한 것은 산업의 관계가 상호보완적이었기 때문이다. 교역할수록 함께 성장하는 관계였었다.
이 관계는 지금도 유효한가. 상황이 급변했다. 한중 수교 30주년이 지난 뒤 불과 1년 만인 2023년에 한국 수출이 중국서 차지하는 비중은 19.74%로 20% 밑으로 내려갔다. 20% 밑으로 내려간 건 19년 만이다. 미국 수출 비중은 18.30%다. 20년 만에 최고 수치다. 월 기준으로는 2024년 2월부터 미국 수출액이 중국을 앞서기 시작했다. 한중 간에는 20년간 지속된 최대 교역국 관계가 끝났다.
한중 수교 30주년이 지나 관계가 급변한 건 크게 두 가지 배경 때문이다. 첫째 미중 패권 전쟁 탓이다. 미국의 중국 견제가 강력해지면서 우리 정부와 기업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 정부의 글로벌 공급망 재편 정책의 영향이 컸다. 둘째 미국 입김이 아니더라도 우리 기업의 탈중국은 이미 시작됐었다. 한국의 기술 자본과 중국의 저렴한 노동력이라는 궁합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두 배경 가운데 좀 더 근본적인 것은 두 번째다. 중국의 인건비가 오른 것은 생산성이 그만큼 향상됐다는 뜻이다. 생산성의 향상은 자본이 축적되고 기술력이 높아졌다는 의미다. 중국은 이제 단지 저렴한 노동력으로 해외 자본을 유치해 승부를 보는 나라가 아니다. 자체적으로 축적한 막강한 자본과 첨단 기술력으로 먼저 치고 나가는 나라가 됐다.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그것이다.
매일경제 최근 보도는 충격적이었다. 이 매체가 산업연구원과 공동 분석한 바에 따르면 우리가 집중하려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우리 기술경쟁력은 중국에 크게 뒤지고 있다. 3D 프린팅 4.7년, 이차전지 3.5년, 바이오 플라스틱 3.4년, 탄소섬유복합소재 3.1년, 시스템반도체 1.7년, 유전자재조합의약품 1.7년, 세포치료제 1.5년, 산업용 로봇 0.9년 등이다. 중국에 쫓기는 게 아니라 이미 뒤처져 있다.
중국의 인공지능(AI) ‘딥시크(DeepSeek)’가 준 충격 못지않다. 이 매체도 딥시크 충격 때문에 양국간 기술경쟁력을 비교했을 터다. 이런 사실이 충격적인 이유는 우리 기업으로서는 생전 처음 하는 경험인 탓이다. 삼성전자가 일본의 반도체 기업을 모두 제압하고 메모리 1등이 된 게 벌써 30년이다. 한국 기업과 경제의 역사는 삼성전자처럼 차근차근 선진국 기업을 따라잡고 극복해 온 과정과 같다.
우리는 지금까지 누군가를 따라잡았을지언정 따라잡힌 경험이 없다. 그 사실이 이제 우리에겐 장애처럼 다가온다. 견디기 힘들어 현실을 외면한다. 어쩌면 다들 착각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중국이 못하는 첨단 기술 분야에 집중해 도망가는 전략을 쓰자고 한다. 그게 가능한 이야기일까. 미국을 능가하는 게 가능한가. 중국은 미국과 쌍벽이다. 미국을 능가할 수 없다면 중국 또한 능가할 수 없다.
미국에 맞서 우리도 컴퓨터 운영체제(OS)를 국산화해야 할 지를 놓고 논쟁을 벌이던 때가 있었다. 다수는 돈키호테적 발상이라 봤다. 지금 중국 대책들이 그럴 수 있다. 혐중(嫌中) 정서까지 있다. 혐중은 계엄 이후 정치세력이 되었다. 1980년대 반미(反美) 운동과 비교도 안 될 정도다. 국민 반이 혐중에 빠져 있다. 중국을 미워한다고 살 길이 생기겠는가. 반미가 실익이 적듯 혐중도 길일 수 없다.
정치인과 관료와 경제전문가까지 혐중에 빠지면 상황은 난처해진다. 망상에서 벗어나 길을 찾아야 한다. 상황 변화에 맞춰 우리 기업이 미국과 그러하듯 중국과도 경쟁할 것은 경쟁하고 협력할 것은 협력하도록 통로를 열어주는 것이 진짜 사는 길이다. 우리는 미국이 아니다. 미국의 전략이 우리의 전략이 될 수는 없다. 우리가 알던 과거 중국은 없다. 지금의 중국은 또 다른 미국이라고 봐야 한다.
/이균성 기자(sereno@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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