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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횡단 도전기] <28> '옥문관, 양관', 신장지역 '하미'


오늘은 오전에 돈황 천불동 석굴을 관람하고, 오후는 실크로드 관문, 당나라 시대 유적 '옥문관, 양관'을 보러 간다. 옥문관(玉門館)은 돈황에서 90킬로 서쪽에 있다. 옥(玉)자는 중국과 한국에서 고귀함의 상징이다. 옥문(玉門) 글자가 지명에 들어갔다는 것은 이곳이 고대 당나라 시대 매우 중요한 지역임을 의미한다.

당나라 시대 만리장성 서쪽 끝은 명나라 '가욕관'보다 훨씬 서쪽인 이곳 '옥문관'이라고 한다. 현재 인구 20만 명의 돈황은 관광이 주업이다. 관광자원은 당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고대 유적들이다.

옥문관 가는 사막의 도로. [사진=윤영선]
옥문관 가는 사막의 도로. [사진=윤영선]

돈황을 조금만 벗어나면 메마른 허허벌판 사막의 연속이다. 옥문관으로 가는 중간에 사막에서 희귀한 자연현상인 '신기루' 현상을 목격하였다. 멀리 사막 앞에 파란 호숫물이 넘실대는 모습이다. 영락없이 커다란 푸른 물이 가득한 호수처럼 보인다.

나와 아내를 비롯한 일행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신기루' 현상을 자세히 보려고 차를 세우고 내려서 사진을 찍는다. 빛이 투과되는지 사진에 나타나지 아니한다. 과거 실크로드 상인들이 사막의 신기루 현상에 속아서 목숨을 잃는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일행 모두 처음 경험하는 사막의 자연현상 목격에 감동적이다.

신기루. 단어는 인생의 허무함과 부귀영화의 덧없음을 비유할 때 '신기루 같은 인생'으로 표현한다. 7월 하순 작열하는 사막의 옥문관으로 가는 길은 한산하다.

옥문관에 도착해보니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옥문관' 표지석과 '소반반성'표지석이 나란히 서 있다. 옥문관을 '소반반성'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소반'(작은 밥상)처럼 생겨서 후세에 붙인 명칭이다. 매표소에서 옥문관 유적까지 300여 미터 걸어가는 길은 사막의 혹서에 땀이 줄줄 흐른다.

옥문관 가는 사막의 도로. [사진=윤영선]
소반반성 표지석 뒤편에 멀리 있는 토성이 옥문관 [사진=윤영선]

'옥문관'은 한나라, 당나라 시대 사용하던 최전방 국경 관문, 군대 주둔지, 사신이 묶어가는 '역참' 업무를 하였다. '역참' 기능은 사신이나 전령 등에게 말을 빌려주고, 식사와 숙박을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끔 나쁜 의미로 사용하는 '사주에 역마살(驛馬殺)이 끼었다'는 역참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어떤 연유로 나왔는지 모르겠다.

흙벽돌로 지은 옥문관 건물은 천수백 년 세월을 잘 이겨내고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옥문관의 텅 빈 내부 공간에 지붕은 없어서 하늘이 그대로 보인다. 지붕으로 사용되던 나무로 만든 서까래와 대들보가 삭아서 없어졌기 때문이다.

옥문관 외벽 흙벽의 두께가 어림잡아 거의 2미터 이상 두꺼워서 적군이 공격해도 끄떡없을 것 같다. 최초로 한나라가 만들고 당나라가 보수해서 사용했으니 2천 년은 되었을 것이다.

옥문관 바로 옆에 유목민 기마병이 침입하면 돈황 사령부에 연락하는 '봉화대' 유적이 가까이 들판에 남아 있다. 지금 이곳은 황량한 허허벌판이지만. 당나라 시대에는 군인이나 숙박객이 이용하는 오아시스 샘과 작은 마을이 있고, 일부는 농사를 짓는 농지도 있었을 것이다.

옥문관 기념관에는 서기 1세기 서역을 정벌한 한나라 '반고' 장군의 동상이 있고, 한나라, 북위 시대 무덤에서 발견된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1500년 전 사막의 무덤 벽화의 귀족 부인의 옷이 화려하고, 놀러 가는 귀부인이 탄 마차의 장식 모습, 여인들의 머리 스타일이 매우 화려하다.

옥문관 가는 사막의 도로. [사진=윤영선]
한나라, 당나라 시대 실크로드 관문 옥문관. [사진=윤영선]

사막의 무덤에서 발견된 2천 년 전 한나라 시대의 밥그릇, 나무젓가락의 채색은 지금 식탁에서 사용해도 문제가 없을 것 같다. 사막의 외부 기온은 40도가 훨씬 넘는다.

우리는 도로변 휴게소에서 '하미과'라고 부르는 멜론과 수박을 자주 사 먹고 있다. 멜론, 수박, 복숭아, 자두 등 뜨거운 햇볕의 사막에서 오아시스 물로 키운 과일은 한국에서 먹었던 과일보다 당도가 훨씬 높아서 매우 달다.

옥문관을 나와서 70여 킬로 북서쪽으로 이동한다. '아단지질공원' 또는 '마귀성'이라고 부르는 지질공원으로 향한다. '마귀성' 가는 길옆에 중국 우주군 군대 기지의 긴 철조망을 지나간다. 자동차로 철조망 울타리를 통과하는데 30분 이상 소요되는 것으로 미루어 그 면적이 얼마나 큰지 상상해 본다. 마귀성에 도착하니 오후 4시다. 바람의 풍화작용으로 형성된 기암괴석 바위 지형이다. 바람 불 때 귀신 우는 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이름이 마귀성이다.

마귀성 관람에 버스를 타고 두 시간 소요된다는 직원의 설명을 듣고 관람을 포기하고, 다시 돌아 나와서 돈황으로 복귀한다. 돈황 외곽에 있는 실크로드의 중요한 관문 중 하나인 '양관'(兩官)을 해지기 전에 들려야 한다.

'양관'은 돈황 서쪽 70여 킬로 떨어진 국경 관문이다. 매표소 입구에 실크로드 개척자 '장건'의 동상이 우리를 맞이한다. 사막의 작은 산봉우리에 토성 형태만 남은 당나라 시대 '양관'의 흔적이 나타난다.

양관은 실크로드의 두 갈래 길, "서역남로와 서역북로"가 갈라지는 지점이다. 우리는 땀을 뻘뻘 흘리며 산꼭대기 토성 흔적까지 올라갔다. 과거 당나라에 들어오는 상인, 여행객 등은 출입증을 받고 입국하고, 출국할 때 출입증을 확인했다.

옥문관 가는 사막의 도로. [사진=윤영선]
당나라 시대 실크로드 관문 '양관' 유적지. [사진=윤영선]

매표소 근처의 최근 복원한 양관 건물의 현판 휘호가 '청뇌헌'聽雷軒)이다. 한밤중에 멀리 사막에서 들려오는 천둥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다는 뜻이다. 아마도 반가운 비가 오는 신호인 천둥소리를 기다린다는 의미라고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 정자의 현판 휘호인 '청설헌(聽雪軒)'이 떠오른다. 겨울밤에 눈이 오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다는 현판과 비슷한 맥락이다.

양관의 남쪽에 눈이 덮인 곤륜산맥이 멀리 아스라히 보인다. 곤륜산맥은 중국인들이 도교의 성지로 신성시하는 산이기도 하다. 곤륜산맥 아랫길을 따라서 '서역남로'가 있다.

당나라 시대는 많은 시인과 문인을 배출하였다. 당나라 3대 시인은 '이백, 두보, 왕유'이다. 시인 '왕유'의 '양관'에서 벗과 헤어지는 송별 시는 매우 유명하다."... 술 한 잔만 더하라고 그대에게 권하네. 서쪽 양관으로 가면 친구 하나 없을 터이니."

왕유의 유명한 송별 시를 여러 편 남겼다.

"말에서 내려 그대에게 술 권하며 묻노니, 어디로 가시오. 그대는 말하길, 뜻을 이루지 못해 남산으로 들어가 숨으려 하우. 그러면 떠나시게, 더 묻지 않으리. 흰 구름은 다하는 때가 없는 법이라우"

하루 종일 돈황 인근을 돌아다니고 저녁 9시가 되어야 식당에 도착했다. 조선족 식당 '돈황 명가'에서 된장찌개, 김치찌개를 먹으며 내일 일정을 생각한다.

돈황에서 이틀을 보낸 후 아침 일찍 400여 킬로 서북쪽에 있는 '하미'로 향한다. 성(省) 이름이 '감숙성'에서 '신장위구르 자치성'으로 변경된다. 서쪽으로 갈수록 건조한 '로프 사막'의 황량함이 아름다운 고독감과 비장함을 느끼게 만든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사방으로 끝이 없는 광활한 사막만 펼쳐져 있다.

'로프사막'은 타클라마칸 사막과 고비사막이 만나는 중간이다. 과거 '서역(西域)'의 뜻은 돈황의 서쪽 지역에 있는 모든 미지의 땅을 의미하였다. 이제부터 서역(西域)의 본격적인 시작이다.

오늘 숙박지 '하미'는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 실크로드, '서역북로'로 향하는 사막 도시이다. 우리는 "하미, 투루판, 쿠차, 아커수"를 지나 파미르고원 인근 도시 '카슈가르'로 갈 계획이다.

옥문관 가는 사막의 도로. [사진=윤영선]
돈황의 실크로드 3대 간선, 천산북로, 천산남로, 서역남로. [사진=윤영선]

이 길은 과거 실크로드 상인이 많이 이용한 길이며, 서기 629년 현장법사가 인도로 갈 때 이용한 길이다. 서기 727년 혜초스님이 인도 여행을 마치고 당나라로 귀국할 때 이용한 주된 서역 루트이다.

'하미'로 가는 400킬로의 사막 길은 오아시스가 거의 없다. 중간에 있는 '유원' 시는 원유가 많이 생산되는 지역이다. 원유채굴 장비가 많이 보인다.

어느 곳은 검은색 사막이 나타나기도 하고, 어느 곳은 자갈이 많이 깔린 사막이 나타나기도 한다. 차량 밖 기온은 43도가 넘는다. 이런 혹서의 사막길을 물도 부족한 상태로 수십일 동안 걸어서 간다고 생각하면 그 어려움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소설 '서유기'의 주인공 '현장법사'가 서기 629년 가을 '하미'로 걸어가는 어려움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인적은커녕, 하늘을 나는 날짐승도 없는 망망한 천지가 벌어지고 있을 뿐이다. 밤에는 귀신불이 별처럼 휘황하고, 낮에는 모래바람이 모래를 휘몰아 소나기처럼 퍼부었다. 5일 동안 물 한 방울 먹지 못하여 입과 배가 말라붙고 당장 숨이 끊어질 것 같아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1400년 전 현장 스님은 하미로 향할 때 현지인 길 안내인을 고용해서 갔다고 한다. 도중에 길 안내인이 강도로 돌변해서 위협을 한다. 가이드에게 좋은 말 한 필을 주고, 혼자서 사막을 걸어서 갔다. 도중에 식수가 떨어져 사막에서 물 없이 5일을 걸었다고 전한다. 현장은 목마름을 참지 못하고, 늙은 말을 죽여서 간을 먹었다고 한다.

옥문관 가는 사막의 도로. [사진=윤영선]
사막의 중간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윤 회장 일행. [사진=윤영선]

과학적 사고방식의 서구 학자들은 현장법사가 사막에서 5일 동안 물 없이 생존한 것에 의구심을 가졌다. 그런데 19세기 말 스웨덴 출신 탐험가 '헤딘'이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사라진 고대 오아시스 도시 유적을 찾으러 갔다가 물이 떨어졌다.

헤딘은 사막을 5일 동안 물 없이 헤매다가 구조되었다. 헤딘은 본인의 경험으로 현장법사의 기록이 맞다고 서술하고 있다.

현장스님, 혜초스님의 신발은 가죽으로 바닥을 덧댄 간단한 샌들일 것이다. 가혹한 사막을 가죽 샌들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모래바람을 맞으며 한발 한발씩 광막한 광야를 외롭게 걸어가는 구법승을 상상한다.

일제 강점기 이육사 시인이 이곳 광야의 풍경을 보았다면 '광야' 시가 어떻게 되었을까?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미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신장성으로 진입하면서 고속도로에서 중국 공안 경찰의 검문 횟수와 강도가 매우 높아진다. 신장지역의 위구르족 테러 문제가 중국당국에 얼마나 큰 문제인지 피부로 느낀다.

하미까지 400여 킬로의 고속도로를 통과하는 동안 6번 공안의 검문을 받았다. 어떤 곳은 여권 확인에 20분 이상 걸리기도 한다. 공안이 외국에서 온 우리를 공안 사무실로 데리고 가서 여행 가방의 짐을 확인하고 여권을 조사한다.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직원의 차량확인 시간도 오래 걸린다. 여행의 리듬이 자꾸 깨지고, 심신을 지치게 만든다. 열심히 달려왔는데 직원들의 검문으로 시간을 많이 빼앗기면 화가 치밀지만 익숙해져야 한다.

옥문관 가는 사막의 도로. [사진=윤영선]
윤영선 심산기념사업회 회장.

◇윤영선 심산기념사업회 회장은 서울고등학교,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위스콘신대학 석사, 가천대학교 회계세무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제23회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국세청, 재무부 등에서 근무했으며 청와대 경제수석실 행정관, 기획재정부 세제실장, 제24대 관세청장,삼정kpmg 부회장, 법무법인 광장 고문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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