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31일 오후 늦게 '투루판'에 도착했다. 타클라마칸 사막 북동부, 천산산맥 남쪽의 도시이다. 과거 실크로드 오아시스 국가 '고창국'의 수도로 유명하다.
불의 도시, 화주(火州)라고 부르는 투루판은 오후 늦은 시각임에도 기온이 40도가 훨씬 넘는다. 7월 말 이곳은 오후 9시 이후 해가 진다. 해지기 전에 투루판 주요 유적을 둘러보아야 하므로 마음이 바쁘다. 북경 표준시 때문에 서쪽으로 갈수록 '일몰시간'이 늦어지기 때문에 오후 늦게까지 유적지 관광이 가능하다.
![흙벽돌 건물은 건포도 건조장. [사진=윤영선]](https://image.inews24.com/v1/f206ffabbed471.jpg)
투루판에 '고창고성, 교하고성, 지하수도 카레즈. 베제크리크 석굴' 등 많은 유적이 있다. 현재 투루판 인구는 70만 명이 넘는다. 타클라마칸 사막 중심에 거대한 현대식 도시가 만들어졌다. 30층 넘는 고층아파트, 도심의 커다란 공원과 인공호수, 두세 겹 겹겹이 심은 가로수 숲길 등 도시계획이 잘 된 초현대식 도시이다.
옛날 오아시스 도시 모습은 전혀 느낄 수 없다. 천산산맥 빙하 녹은 물을 끌어와서 식수를 제공하고, 주변 농지에 포도, 옥수수 등 농작물을 재배한다. 현재 중국 전체 미분양 아파트가 1억 채가 넘는다고 하는데, 투루판의 고층아파트도 분양이 잘 되는지 걱정이 든다.
투루판부터 위구르족이 한족보다 많다. 시내 건물의 상호, 도로 표시판 등은 중국어 한자를 위에 크게 적고, 아래쪽에 위구르어 문자를 병기하고 있다. 투루판 인구의 70%가 위구르족이다. 나이 든 위구르족은 중국어를 몰라서 좋은 일자리 구하기도 어렵다.
투르판 전체에 넓은 포도밭, 건포도를 말리는 흙벽돌 창고가 도로 옆에 많이 나타난다. 투루판 전체의 70% 면적에 포도를 재배한다. 흙벽돌로 지은 건조장에서 말리는 '씨 없는 건포도'는 세계적으로 매우 유명하다. 아내는 시내 과일 가게에서 투루판에서 생산된 여러 종류의 건포도를 샀다. 건포도의 품질은 훌륭하고 값이 매우 저렴하다.
실크로드의 가장 위험한 구간인 타클라마칸 사막, 파미르고원 등은 상인들에게 죽음의 길로 불렸다. 인도에서 전래한 불교는 파미르고원을 넘어 타클라마칸 사막의 오아시스를 따라 동쪽으로 전파되었다. 여행의 안전과 구복을 위해서 서역 곳곳에 사찰과 석굴이 지었다.
인도에서 시작 아프가니스탄, 쿠차, 투루판, 돈황 등 실크로드 전역에 불교 사찰과 석굴을 만들었다. 아마 가장 동쪽의 석굴이 경주 토함산 석굴암(751년 신라 김대성 만듬) 이다.
![흙벽돌 건물은 건포도 건조장. [사진=윤영선]](https://image.inews24.com/v1/84a11dbe158ef9.jpg)
오후 4시 고창고성에 도착했을 때 섭씨 44도 높은 기온이다. 더위 때문에 관광객은 우리뿐이다. 매표소 여직원도 한참 기다린 후 나타난다. 고창고성은 서기 6세기, 7세기 '고창국'의 수도이고, 서기 9세기 이후는 위구르 왕국의 수도였다.
고창고성 매표소 앞에 당나라 '현장법사' 동상이 죽창을 들고 우뚝 서 있다. 고창고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지었으며, 성곽의 길이가 5킬로이다. 전동카트를 타고 폐허가 된 1400년 전 고창고성 유적을 둘러보았다. 불탑(佛塔)의 초창기 형태인 '스투파'는 외부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스투파(탑) 내부에 있던 불상은 이슬람교에서 우상숭배를 파괴한다는 명분으로 대부분 파괴됐다.
특히 불상의 눈이 집중적으로 훼손되어 있다. '눈'은 영혼의 상징이기 때문에 눈을 파괴하면 영혼을 파괴할 수 있다는 미신 때문이다. 스투파 외부 벽면의 부처상도 대부분 훼손되어 흔적만 남아 있다. 이슬람교를 믿는 후손들이 자기들 선조들이 믿고 건설했던 불교 유적을 파괴한 것을 보면서 광신적 종교 권력의 무서움에 전율이 느껴진다.
인도에서 시작한 스투파 양식은 중국, 한국으로 오면서 우리가 절에서 흔히 보는 아담한 '석탑'으로 변했다. 반면, 태국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 소승불교 국가의 탑은 황금색을 입힌 거대한 '접시 모양 탑'으로 변했다. 이슬람교가 쿠차, 투르판 신장에 15세기, 16세기 들어오면서 불교,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등 여러 종교는 모두 없어지고, 현재는 이슬람교만 유지되고 있다. 이(異)교도를 인정하지 아니하는 종교의 편파성이다.
서기 629년 가을 현장법사가 고창국 왕(국문태)에게 설법했다는 법당 유적은 최근에 복원하여 깔끔하다. 고창 왕은 하미에 도착한 현장법사의 소식을 듣고, 투루판으로 모셔 와 국빈급 대우를 했다. 고창 왕은 현장에 고창국에서 불법을 계속 설법해줄 것을 부탁했다. 현장은 천축에 가야 한다며 단식투쟁을 하며 단호히 떠나겠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타협하여, 한 달만 설법하고 떠나기로 하였다. 대신 현장이 공부를 마치고 당나라로 귀국할 때 고창국에 들려 불법을 설법하기로 약속했다. 고창왕 국문태는 현장이 떠날 때 동행할 승려, 인부, 말을 주고, 비단, 금은보석 등 여비도 듬뿍 주어 현장이 천축에서 공부하고 당나라로 돌아올 때까지 쓸 만큼 충분한 재물을 주었다.
![흙벽돌 건물은 건포도 건조장. [사진=윤영선]](https://image.inews24.com/v1/e1f11e9c74c3bb.jpg)
고창 왕은 당시 유목민 강대국 '서돌궐'의 왕, 인근 오아시스 왕들에게 소개장을 써주어 현장이 천축에 가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17년 후 645년 현장이 귀국할 때 이미 고창국은 당나라에 멸망(640년)된 상태였다. 현장은 투루판에 갈 일이 없어졌기 때문에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 '서역남로'를 통해 귀국한다.
투루판 지역은 9세기 중반부터 위구르 왕국의 지배를 받는다. 지금 우리가 보는 고창고성의 유적은 실제는 위구르 왕국이 수리해서 사용하던 것이다.
고창고성의 '흙벽돌'은 버드나무 가지와 풀줄기를 찰흙과 섞어서 만들었다. 나무가 없는 사막 지역이니 흙이 건물의 주원료이다. 고창고성 성벽이 쉽게 망가진 이유는 이곳 농부들이 나뭇가지, 풀줄기가 들어간 흙벽돌을 가져다가 부수어서 비료로 사용하는 바람에 빨리 망가졌다고 한다. 고창국은 왕 국문태가 대외관계를 오판하여 서기 640년 당나라에 멸망 당했다. 고창왕은 실크로드 무역이익을 독점하기 위해 유목민 강대국인 서돌궐과 동맹을 강화하고, 인근 영세 오아시스 왕국을 압박했다.
고창왕은 수천 킬로 떨어진 당나라가 군대를 파견하지 아니할 것으로 오판한 것이다. 핍박을 받은 오아시스 소국들은 멀리 장안에 있는 당나라 태종에 구원 요청을 했다. 당 태종은 장안에서 수천 킬로 투루판까지 군대를 파견해 640년 고창국을 멸망시켰다.
당 태종의 아들인 당 고종은 서쪽의 강대국 서돌궐도 655년 멸망시켰다. 당 태종(이세민)은 645년. 647년 두 차례 고구려를 침략하여 전쟁에서 패배했었다. 당 태종은 죽기 전 아들에게 향후 고구려를 침략하지 말 것을 유언하였다. 당 태종의 아들인 당 고종이 서쪽의 위협 세력인 서돌궐을 먼저 멸망시켜 서쪽 국경을 안정시킨 후 동쪽 한반도로 군대를 보내 백제(서기 660년)와 고구려(서기 668년)를 멸망시킨다.
서돌궐을 무너뜨린 당나라 장군은 '소정방'이다. 소정방은 백제 침략군 사령관으로 부여에 와서 백제 멸망 후 부여의 '정림사지' 5층 석탑에 자기의 전공을 기록해 놨다. 역사에 가정이 없지만, 만일 서돌궐이 쉽게 멸망하지 아니했으면 신라의 삼국통일이 다른 방향으로 갔을 수도 있을 것이다.
![흙벽돌 건물은 건포도 건조장. [사진=윤영선]](https://image.inews24.com/v1/0bdb4844feb04e.jpg)
고창고성을 본 다음 오후 7시경 '교하(交河)고성'에 들렸다. 늦은 시각임에도 입장권을 팔아 다행이다. 기원전 3세기 투루판에 있었던 '차사왕국'의 수도가 '교하고성'이다. '야르나이즈강' 가운데 버들잎 모양의 작은 섬이 있다. 길이 1600미터, 폭 300미터의 작은 섬에 수도를 만들었다. 섬 양옆으로 강물이 흘러서 성을 보호하는 해자(垓子) 역할을 한다. 교하(交河)는 두 개의 강물이 교차한다는 의미이다.
지금은 강물이 매우 적지만, 2천 년 전은 강물의 수량이 많았던 것 같다. 교하고성 옆 하천에서 동네 소년들이 물놀이와 수영을 하고 있다. 약소국 '차사왕국'은 2,200년 전 강대국 흉노족과 한나라에 각각 왕자를 볼모로 보냈다. 두 강대국에 줄타기 외교를 하다가 한나라에 멸망된 작은 오아시스 왕국이다.
교하고성의 사찰, 관공서, 주거용 동굴은 자연 상태의 흙산을 파내서 동굴을 만들어 '주거형 건물'을 만들었다. 대불사라는 커다란 절터도 있다. 반면, 고창고성은 평지에 흙벽돌을 쌓아서 만든 벽돌 건물이다. 외관은 비슷한데 건축 방법에 차이가 있다.
어쨌든 2천 년 넘게 긴 세월의 풍파를 지나고도 남아 있는 역사의 흔적을 보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실감한다. 문인들은 '폐허의 미'라고 표현하며 멋진 시를 썼다. 폐허 도시를 보며 시를 쓴 당나라 시인 두보가 쓴 '춘망(春望)'이라는 유명한 시가 있다.
"나라는 망하여도 산하는 남아 있어/ 성안에 봄이 오니 수목만 무성하구나/ 시국을 생각하니 꽃도 눈물을 뿌리게 하고/ 이별을 한탄하니 새도 마음을 놀라게 하고/ 봉홧불이 석 달이나 계속되니/ 집에서 오는 편지는 만금에 해당한다."
포도를 재배하려면 물이 많이 필요하다. 일 년 강수량이 20여 밀리로 거의 비가 안 오는 지역인데도, 투루판 지역의 70% 면적이 포도 재배 지역이다. 투루판 농민은 지하에 수로로 연결된 '카레즈'를 만들어 농사를 짓는다. 수백 킬로 떨어진 천산산맥의 물을 지하에 땅굴을 만들어 끌어온다. 위구르어로 '투루판'은 '패인 땅'이라고 한다.
![흙벽돌 건물은 건포도 건조장. [사진=윤영선]](https://image.inews24.com/v1/c981a8b6fd9203.jpg)
해수면 이하 저지대가 투루판 면적의 80%가 넘는다. 세계에서 가장 저지대인 해저 150미터의 땅도 투루판에 있다. 저지대는 매우 건조해서 '증발 지수'가 매우 높고 혹서의 무더운 날씨를 만든다. 수로를 지상으로 만들면 물이 투루판에 도착도 하기 전에 전부 증발한다.
지하 10미터 깊이에 수로를 파서 연결한 수로의 전체 길이가 5천 킬로라고 한다. 기원전 7세기 이란으로부터 기술을 들여와 수천 년 동안 땅속에 수로를 판 셈이다. 지금도 계속 지하 수로를 보수해서 포도 재배와 농업용수로 사용함에 경이로움을 느낀다.
중국인들은 "만리장성, 대운하, 카레즈 지하수로"를 3대 토목사업이라고 자랑한다. '카레즈'는 중국이 만든 것이 아니고 이란계 민족과 위구르족이 만든 것이다.
우리가 방문한 카레즈는 돈을 내고 들어가는 관광용 카레즈이다. 건물 한쪽에 위구르 민속무용 공연장이 있다. 실제 포도 재배 농민들의 농업용 카레즈는 당국이 허가를 안 하기 때문에 볼 수가 없다.
중국은 과거 이 지역 사람을 '색목(色目)인'이라고 불렀다. 눈동자 색깔이 한족과 다른 이란계 인종이다. 동양 인종인 흉노족, 한족, 티벳족, 위구르족이 이 지역을 돌아가며 지배했지만, 점령자들은 소수 숫자이고 다수의 피지배 원주민과 혼합되면서 유럽계와 동양계의 혼혈로 외모가 변했다.
오후 늦게 도착하여 투루판의 고대 유적을 보고 밤 9시 이후 저녁 식사를 하러 갔다. 기름진 중국 음식과 중국 독주 배갈은 조합이 잘 맞는다. 피곤함을 이기기 위해 몇 잔의 반주는 필수이다. 식사를 마치니 밤 11시이다.
![흙벽돌 건물은 건포도 건조장. [사진=윤영선]](https://image.inews24.com/v1/9214052e0a4af4.jpg)
◇윤영선 심산기념사업회 회장은 서울고등학교,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위스콘신대학 석사, 가천대학교 회계세무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제23회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국세청, 재무부 등에서 근무했으며 청와대 경제수석실 행정관, 기획재정부 세제실장, 제24대 관세청장,삼정kpmg 부회장, 법무법인 광장 고문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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