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묘하게도 대한민국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꾼 업적을 남긴 대통령들은 한때 사상적 문제로 사형 선고를 받은 이력이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대통령(이하 직명 생략)이 그렇습니다. 이 분들의 일대기(一代記)를 읽다 보면 문득 '큰 인물은 하늘이 내린다'는 옛말이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 일을 맡기려 하면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괴롭히고…하는 일마다 어지럽게 한다. 그 이유는 그의 마음을 흔들어 참을성을 기르게 하기 위함이며, 지금까지 할 수 없었던 그 어떤 사명도 감당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맹자에 나오는 말입니다.
대통령은 법에 의하여 나랏일의 최종 해결자로서 막중한 책임과 권한을 부여받습니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Buck stops here)"는 명패를 선물 받아 자기 책상 위에 놓았던 윤석열은 맹자의 말처럼 하늘이 준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주저 앉고 말았습니다. 작년 말 비상계엄 이후 법을 어긴 윤석열은 구치소로 갔고, 법에 의지한 이재명은 용산으로 갔습니다. 취임 30일 기자회견에서 그는 "여소야대 대통령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윤석열이 힘들었을 것"이라며 속내를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던졌습니다.
이재명은 다른 대통령들과는 조금 다른 이력을 안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되기 직전까지 그를 커다란 곤경으로 몰아넣었던 개인의 사법적 문제들이, 대통령이 된 이후 지금까지도 그의 행보를 불편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가 본인의 사법적 문제 들에서 벗어나고자 여당과 더불어 무리한 시도를 계속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그렇다고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날 약속했던 '국민 통합'을 잊었거나 접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의 약속이 지켜지기를 바라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가도 살고 그도 사는 길은 무엇인지를 국내외 환경을 둘러보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나라 밖과 연계된 문제로는 관세와 한미동맹, 그리고 대북정책 등의 현안들이 과거와는 차원이 다르게 우리를 긴장시키고 있습니다. 한미 정상회담으로 미국에 다녀오면서 치아가 흔들렸다는 그의 말에는 연민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러나 금방 결론이 날 것 같던 관세나 한미동맹 문제는 아직 협상에 큰 진척이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제 짧은 소견으로는 속전속결로 승리를 자랑하고 싶은 트럼프가 조바심을 낼수록, 우리는 더 인내하는 자세로 시간을 갖고 그를 설득해야 할 것입니다. 손자병법으로 말하면 적진아퇴(敵進我退) 전략입니다. 지난 시절의 단순한 군사적, 경제적 지원 관계를 넘어, 이제는 미국이 여러 분야에서 우리에게 강력한 동반자로 함께 하기를 원한다고 보기 때문에 그런 전략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미국이 삼권분립과 시장경제를 유지하는 한, 우리는 트럼프의 4년을 넘어 혈맹으로서 미국과의 동반자 관계를 더욱 굳건히 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믿음입니다. 이런 문제들은 국내 법에 의지하여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지라도, 실용과 임기응변에 능한 이재명에게는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국은 주변 국가들을 다스리는 중심국가를 말합니다. 지금은 대표적으로 미국과 중국입니다. 중국은 한족(漢族)의 민족국가였고 주변 나라들은 조공을 바치던 속국이었습니다. 황제 시진핑은 트럼프의 귀에 대고 '대한민국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황제 트럼프는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어쩌면 인류가 만든 최초의 계약국가가 미국일 것입니다. 계약은 약속입니다. 전사자의 유해를 끝까지 찾아오는 것도 계약을 지켜야 국가가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삼권분립도 국민과의 약속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역사적으로 한반도 주권에 영향을 미쳤던 강대국 가운데 상호존중을 실천한 나라는 미국입니다. 그러고 싶어서 라기 보다 미국 자체가 집단지성에 의하여 유지되는 계약국가이기 때문입니다. 잘하는 일도 있고 잘못하는 일도 있는, 사람사는 나라일 뿐입니다. 나라에 부채가 쌓이니 이제는 백만달러에 영주권까지 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 중차대한 나라 밖 문제에 비하면, 나라 안의 문제들은 훨씬 가벼워야 할 터인데 오히려 더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법으로 우리끼리 해결해야 할 문제임에도 그렇습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국민을 위해서 필요한 법이 그 본래의 존재 이유를 잃고 법과 법이 부딪치는 악순환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제일 심각하고 중대한 우려는 정치체제를 바꾸려는 시도에 대한 국민적 의구심입니다. 이 정부의 슬로건인 '국민주권정부'가 무슨 뜻인지 점점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재명은 취임 100일 만에 '내란재판부' 설치라는 말을 꺼냈습니다. 말을 쉽게 뒤집는 분이지만 이 말은 그렇게 허투루 들리지 않고, 우려하던 속내가 드러난 것 같기도 합니다.
지금 민주당이 밀어붙이는 검찰 개혁 법안도 중국식 '인민 사법' 제도와 비슷한 골격이라는 칼럼을 읽으면서, 중국 공산당 당교(黨校) 교수였던 조선족 조호길이 쓴 '중국의 정치권력은 어떻게 유지되는가'라는 책이 생각났습니다. 이 책은 박근혜에서 문재인으로 정권이 넘어 갔던 2017년에 쓴 것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당이 정부보다 위에 있게 되는 중국공산당의 역사를 자세히 조명합니다. 그리고 중국공산당과 서구식 정당 중에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 지는 독자들에게 답을 넘기면서 책을 끝내고 있습니다. 이 책은 지금은 절판(絶版)입니다.
베이징대 장웨이잉 교수의 말 대로 중국식 민주주의는 '정치는 일당독재, 경제는 국가기업'입니다. 서구식 민주주의는 '정치는 삼권분립, 경제는 시장경제'입니다. 심판이 공정하다면 가위바위보 이상의 게임 룰은 아직 인간이 찾지 못했습니다. 솥을 걸 때 삼발이를 쓰는 것도 그것이 가장 안정적이기 때문입니다. 국가 권력을 셋으로 나누는 이유도 그와 같습니다.
장기는 두는 사람보다 훈수꾼이 활로(活路)를 더 잘 본다고 합니다. 지금 이재명의 활로는 명확해 보입니다. 국민들이 대통령 자리에서 내려온 그의 사법처리를 원하지 않으면 됩니다. 아직 4년8개월 남아 있습니다. 대통령은 도도한 시대의 흐름을 읽고, 나라를 그 방향으로 끌고 가야 합니다. 살아서 많은 저항을 받았던 박정희는 죽어서 영웅이 되었습니다.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며 그는 초지일관 긴 안목으로 정책을 밀어붙였습니다. 그가 만든 고속도로, 제철소, 산림녹화, 새마을운동, 주민등록번호, 과학기술원, 국방과학연구소 같은 유형 무형의 인프라들은 시너지를 일으켜 지금 이 나라 부(富)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이재명은 어떤 인프라를 깔고 내려올지 궁금합니다.
사법개혁, 사대강과 탈원전 등 환경 정책, 마중물 류(類)의 소득주도 경제 정책, 주택정책 등은 문재인이 실패했던 정책들의 시즌2를 보는 것 같습니다. "내가 하면 다르다"는 아집으로 국민들에게 또 다시 고통을 겪게 해서는 안 됩니다.
서민들에게 주가(株價)는 허상입니다. 마중물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정치적 목적을 수단으로 내세우면 과거 아르헨티나 꼴이 납니다. K-컬처는 안 건드리는 게 도와주는 겁니다. 방산(防産)도 전 세계적으로 무기 수요는 늘고 있으니 잘 굴러갈 것입니다. 부정선거 의혹도 한미정상회의에서 트럼프가 그냥 넘어갔습니다. 유튜버들의 장외경기는 건전한 정치문화에 전혀 도움이 안 되지만, 이것도 이미 세계적 추세라 뾰족하게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부하들이 올리는 수많은 정책들에 대하여, 오직 국민살림만을 판단 기준으로 생각하면 그는 성공한 대통령이 될 수 있습니다. 경제를 상징하는 부(富)라는 글자를 풀어보면 움집 안에 물건이 가득 쌓인 모양을 나타낸 것입니다. 여느 대통령이나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사법 리스크를 안고 있는 이재명에게 절체절명의 활로는 경제입니다.
윤석열과 이재명의 컬트 드라마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당분간 야당은 윤석열의 내란 여부를 놓고 자중지란(自中之亂)을 겪을 것이나, 분명한 건 지금 당장 투표를 해도 적어도 40% 내외의 그에 대한 지지 표가 나올 것이라는 점입니다. 윤 부부를 동여맬수록 인정 많은 한국유권자들의 표는 그쪽으로 갈 것입니다.
법에 의지하는 나라를 걱정하는 분이 얼마 전 "'검사 떼'가 밀려나니 '변호사 떼'가 몰려드는구나. 정치인 변호사가 넘쳐나면 국가와 정치를 망가뜨린다"라는 칼럼을 썼습니다.
글을 마치면서 이재명에 대한 기대와 당부를 전하고자 합니다. "의법사 의경생. 국부즉명생 (依法死 依經生. 國富卽明生 - 법에 의지하면 죽을 것이요, 경제에 의지하면 살 것이다. 나라가 부강해야 이재명도 산다.)"
이순병, 한국공학한림원 원로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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