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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병기의 문화인사이트]역사스페셜이 ‘징비록’을 새삼 조명한 이유는?


[아이뉴스24 서병기 기자] 지난 11일 방송된 KBS 1TV ‘역사스페셜-시간여행자’는 임진왜란에 대한 관점을 정립한 책인 '징비록'을 조명했다. 방송 목적 중 하나는 시청자에게 ‘징비록’이 왜 일본에서 더 많이 읽혀 해군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었는가를 전하고 싶었던 것 같다.

'징비록'의 내용이 반영된 일본 에도시대 그림책 '에혼 타이토기'에는 길가에서 죽은 어머니의 젖을 빠는 아기 이야기를 들은 류성룡이 눈물을 쏟는 장면이 나온다. [사진=KBS]

‘징비록’의 저자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전쟁 최고 지휘관이자 영의정이었던 서애 류성룡이다. 조선의 관료가 회고록을 집필하고 후세에 자신과 관련된 여러 기록을 남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학자, 유학자 등이 문집이나 유학, 처세에 관한 책을 남기는 경우는 있어도.

이것부터가 집필의도중 하나가 좀 솔직해보자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징비록’은 “미리 내 지난 잘못을 경계하여 뒷근심이 없도록 삼가노라”라는 ‘시경(詩經)의 말씀대로, 임진왜란과 그 전후의 사정에 대해 후손들에게 경계하기 위해 본인의 경험을 담아 썼다.

류성룡은 임란중 선조를 모시고 몽진을 떠났으며, 영의정으로 전시총사령관이자 행정수반으로 나라를 이끌었다. 누구보다 임란의 겉과 속을 잘 안다. 하지만 임란이 끝날 무렵인 58세때 ‘적과 화친을 주장해 나라를 그르쳤다’며 탄핵을 당하면서 정치적으로 밀려난 그는 아예 고향인 안동으로까지 낙향해 하회마을의 옥연정사(玉淵精舍)에서 7~8년간 저술에 몰두한다. 계승범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는 “다시 정치할 생각이 있었다면 용인보다 멀리 내려가지 않았을텐데, 안동으로 내려갔다는 건 정치나 관직에 뜻이 아예 없다는 것으로 해석된다”고 설명했다.

‘징비록’은 현재에도 전체적으로 37종으로 출간돼 있다. 400년동안 생명력을 이어오고 있다. 이날 방송에서는 ‘징비록’이 오래 살아남는 힘은 류성룡 자신의 실패와 고뇌까지 적어나갔다는 점을 꼽았다. ‘인간’ 류성룡의 모습이 고스란히 반영됐다는 것. 그는 나라를 지키지 못한 정치가의 참회록을 쓰다보니 잘 운다. 자신이 겪었던 사건과 감정을 숨기지 않고 기록했던 것.

“군량미가 바닥나서 명나라 장수들이 철군하자고 한다.(...) 계속 사과하면서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

“(임금께) 이 말을 하면서 나는 감정이 북받쳐 오열하고 눈물을 흘렸다”-징비록 중

'징비록'은 국가 주도의 공식 편찬물이 아니라 개인이 편찬한 책인데도 방대한 실제 공문서와 자료를 붙여놓아 공신력을 극대화하며 단순한 사료 이상의 가치를 지닌 글이 됐다. 계승범 교수는 “사실과 정보, 자료를 단순 나열한 게 아니라, 모든 자료를 수집해놓고, 그 자료들을 종합적으로 이해한 상태에서 어떻게 구성할까? 하고 생각하며 썼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주관적인 의도를 반영해 쓴 작품이다”고 말했다.

'징비록'은 류성룡 사후 목판본으로 간행됐다. 그러나 류성룡이 직접 쓴 초고가 국보 132호로 현재 남아 있다. 전문가와 함께 친필 초고와 출간본을 비교해 보면, 이야기를 다듬으려 한 고심의 흔적이 드러났다. 먹으로 쓰다보니 처음에 썼다 시커멓게 지우고 고치고, 덧붙인 부분이 많았다. 초본과 간행본, 판본이 거듭되면서 기록들도 조금씩 바로잡혀갔다.

‘징비록’에는 조선과 일본, 명나라 사람들을 포함해 등장인물이 무려 300명에 육박한다. 관료와 무장뿐만 아니라 역관과 군졸까지 등장한다. 영조와 정조는 국가의 안보를 위한 교과서로 삼을 정도였다. 요즘도 미국 서던미시시피 대학의 사학과에서는 ‘징비록’을 교제로 삼아 공부한다.

300명중 주인공은 이순신이다. ‘징비록’은 “사람들은 이순신을 신(神)으로 여겼다”로 끝맺는다. 그런 이순신을 선조에게 천거한 사람이 류성룡이다. 저자가 “나 좀 멋있지?” 하며 폼 잡는 느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을 제기한다. 7년간의 전쟁, 그 처절한 반성과 극복의 기록. 훗날 조선을 위해 쓰여진 이 책을 적(敵)이었던 일본인들이 왜 읽고 있는지, 시간여행자 지승현이 궁금해한다.

에도 시대 일본에서는 전쟁 소재의 역사 서사 문학이 대중적으로 유행했다. ‘징비록’을 바탕으로 한 군기물이 큰 인기였다. 쓰시마를 통해 전해진 '징비록'은 상업 발달과 함께 성행한 도서 대여점을 통해 많은 이들이 돌려 읽었다.

일본 도쿄 진보초 고서점가에서는 17세기말 일본에서 간행된 ‘징비록’이 지금도 꾸준히 거래되고 있다고 한다. 토조 히로코 고서적 판매상은 “베스트셀러처럼 다시 한번 인쇄해 더 널리 유행시키려는 의도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징비록'은 저자인 류성룡이 임진왜란 관련 사실들을 모아놓고 의미를 찾아 재구성한 작품이다. [사진=KBS]

에도시대에 ‘징비록’이 널리 읽혔다는 사실은 이 책속에도 남아있다. 일본 대여업자의 인장이 있다는 것은 오늘날의 도서관의 책처럼 널리 읽혔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인에게 낯선 조선 8도의 고을 이름과 지도가 붙여져 일종의 안내서 역할도 한다.

도요토마 히데요시의 일대기를 담은 에도 시대 일본의 베스터셀러 그림책인 ‘에혼 타이코기’(繪本太閤記)에는 ‘징비록’의 내용이 그림으로 되살아났다.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 원정 막바지에 울산성에 들어가 군량미가 바닥이 나, 병사들이 기아 상태에 빠지며 굶주리는 장면이 나온다.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만화를 그리는 만화가 토도 유타카는 울산을 실제 답사하며 기토 기요마사는 당시 성안에 물이 없어 고생한 사실을 직접 확인했다. 지반이 돌이라 우물을 파도 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 토도는 “‘징비록’은 1차 사료로 매우 중요해 상당히 참고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류성룡은 설경구로 그렸다. 선조는 송강호로 그렸다. 선조는 멋있는 면도 있지만 매우 한심한 면도 있는 왕이다. 이순신은 먼 곳을 바라보며 이 나라(조선)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만을 순수하게 생각하는 사람으로 그렸다”고 전했다.

일본인들은 임진왜란 이후 100여 년간, 자신들이 맞서 싸운 조선 장수들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징비록'을 통해 비로소 이순신, 김시민과 같은 조선 측 인물들의 이름과 행적을 알게 된 것이다. 김시민은 훗날 가부키에서 괴물로 등장하며, 일본인에게 공포의 대상이 됐다. 일본인들은 ‘징비록’을 통해 김시민이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사망했다고 관련 서술을 수정했다. 제작진과 만난 일본의 한 전문가는, 당대 일본이 조선 자료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조선 왕조의 시각을 이해할 때 ‘징비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징비록’ 전만 해도 명나라 서적을 통해 일본에 알려진 이순신은 ‘이 통제’(통제사, 統制使)라는 보조적 인물이었고, 일본 내에서 조선 수군의 대표적 리더는 원균으로 알려졌다. 일본에서는 ‘징비록’을 통해 임진왜란의 진정한 명장이자 영웅은 이순신이라는 사실이 전해졌다.

“그 전에는 이순신도 노량해전에만 잠깐 등장해, 명나라 장수 등자룡을 구하러 갔다가 금세 전사해버리는 정도로 나온다. 전쟁이 끝나고 ‘징비록’이 일본에서 간행되는 100년간은 전쟁을 이끌었던 조선 장수가 누구라는 사실은 알 수 없었다.”(김준배 해군사관학교 교수)

일본에서 간행된 ‘조선군기대전’에서 이순신은 문과 무, 충과 효까지 모두 갖춘 대단한 장군으로 형상화한 것도 ‘징비록’의 내용을 더욱 더 극대화한 것이다..

일본은 임진왜란으로부터 350년뒤 진주만을 공격하며 태평양 전쟁을 시작하는데, 그 공격을 이끈 것은 일본의 해군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해군 장교들이 주목한 인물은 다름 아닌 이순신이었다. 일본이 '징비록'을 통해 임진왜란에서 배운 교훈은, 육군이 아무리 강해도 해전에서 이기지 못하면 전쟁에서 패한다는 것이었다.

“임진왜란에서 (일본) 육군은 너무 강력했다. 개전 20일만에 한양을 점령할 정도였다. 하지만 해군이 너무 약해 이순신에게 단 한번도 이기지 못했다. 육군이 아무리 강해도 해군이 약하면 결국 전쟁에서 질 수밖에 없다는 걸 너무 잘 보여주는 사례가 이순신의 사례다.”(김준배 해군사관학교 교수)

적국의 영웅을 거울삼아 해군을 육성한 일본은 이순신과 '징비록'의 교훈을 발판 삼아 해군력 육성에 중점을 두었다. 이렇게 키운 해군력으로 일본은 러시아 함대를 꺾었고, 이후 한국을 강제 병합하며 대륙 침략에 나섰다. 이순신과 ‘징비록’을 받아들인 일본의 행보를 우리는 씁쓸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

“사실 일본의 해군 장교들도 처음 이순신을 언급할 때는 쓰고싶어서 썼던 건 아니다. 실패를 기록하는 것은 자못 불쾌한 감이 있다. 그러나 해상권의 중요성을 말하고자 한다면, 실패한 사적을 거론해서 이를 거울로 삼지 않으면 안된다는 이야기를 한다. 근데 이것이 사실은 ‘징비록’에서 하는 이야기다. ‘과거의 잘못을 징계하여서 후환을 대비한다’는 것 아닌가? 일본인들도 자기가 쓰기 싫었지만 과거의 잘못을 써 후환을, 그러니까 해군력을 강화해서 후환을 대비하고자 한 것이다.”(김준배 해군사관학교 교수)

‘역사스페셜-시간여행자’ 징비록편은 400년전 생생한 ‘기록의 힘’을 잘 보여주었다. '징비록' 편을 보면서 이런 생각도 들었다. 메이지 시대 일본 개화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미국과 유럽을 여행하고 쓴 책 ‘서양사정(西洋事情)’이 1866년 출판돼 무려 24만부가 팔렸다. 당시 도쿄 인구가 많기도 했지만, 2000권만 팔려도 베스트셀러가 되던 시절이다. 이 덕분에 많은 일본인들이 서양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1868년 메이지 유신도 이런 토대 위에서 이뤄졌다.

하지만 1881년 조선의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가 후쿠자와의 제자가 된 유길준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서양 문물 소개서이자 국한문 혼용체 저서인 ‘서유견문’(西遊見聞)을 1895년 간행했지만, 많은 사람이 읽지 못했다.

‘서유견문’에는 서구 근대 문명의 제도와 사상, 풍물을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다. 국가의 권리, 인민의 의무, 정부의 운영 방식, 법률, 군대, 조세제도, 화폐 및 은행 제도 등 근대 국가가 갖추어야 할 정치·경제적 조건뿐만 아니라 서양인의 혼례와 장례 방식, 의복과 음식 문화, 오락, 박람회, 도서관, 병원, 교도소, 증기선과 기차, 서양 대도시의 조감 등도 기행문체로 서술하고 있다. 이 중에는 상당 부분이 스승이 쓴 ‘서양사정’의 내용을 번역하거나 요약해 쓰여진 것이다.

‘서유견문’의 내용에 대해서는 호불호와 찬반양론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갑신정변 주동자와의 친분 탓 등의 이유로 금서로 지정돼 당시에는 일반 백성은 볼 수 없었고, 극소수만 볼 수 있었다. 유길준은 친일파와 독립개화파중 한 쪽으로 일관성을 가지고 행동하지 않아, 평가하기 애매한 부분이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조선인으로서는 일본과 미국에 거의 최초로 유학간 지식인이다. 지식과 글은 공유될 때에만 힘을 발휘한다. 그래서 '서유견문'이 당시 다수에게 읽히지 못한 건 안타까운 일이다.

/서병기 기자(wp@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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