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이재용 기자] 금융당국이 국내 은행 과점 체제 해소 방안으로 추진하는 '특화은행' 설립 구상이 큰 변수를 맞았다. 대표적인 특화은행 모델로 제시한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이 파산하면서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금융보호혁신국은 지난 10일(현지시간) 불충분한 유동성과 지급불능을 이유로 SVB를 폐쇄하고, 미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를 파산 관재인으로 임명했다. SVB의 파산은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문을 닫은 저축은행 워싱턴뮤추얼 이후 역대 두 번째로 큰 규모다.
◆서부 스타트업 돈줄 SVB 파산…특화은행 취약성 드러나
실리콘밸리에 본점을 둔 SVB는 30개 지점(캘리포니아주 24개, 매사추세츠주 6개)을 보유하고 있는 상업은행으로, 자산규모가 2천90억 달러에 달했다. 기술 산업과 관련한 투자회사와 기술 산업 스타트업 기업에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특화했다.
SVB의 재무 상황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발생 이후 큰 변화가 생겼다. 극단적인 저금리 상황과 실리콘밸리 지역의 은행 주요 고객의 유동성 자금 증가에 따라 은행의 예수금 규모가 많이 증가했고, 이를 유동성이 높은 안전자산에 투자하면서 유가증권 비중이 크게 늘었다.
지난 2019년 말 대비 2021년 말까지 단 2년 동안 자산규모는 3배 증가했는데, 총자산 규모 141억 달러 중 대출 증가 규모는 총자산 증가분의 약 24%인 41억 달러에 불과했다. 증가한 자산의 71%는 유가증권(99억 달러) 부문이었다.
문제는 지난 2022년 초부터 미국의 정책금리 인상이 본격화하고, 주요 고객인 벤처기업과 스타트업의 유동자금이 마르기 시작하면서 불거졌다. 예금 기업에 맡긴 돈을 돌려주기 위해 SVB는 그간 사둔 미 국채 등을 팔아 자금을 마련해야 했다.
채권 가격은 치솟은 금리와 반대로 폭락했으나 SVB는 어쩔 수 없이 미 국채로 구성한 매도가능증권(AFS)을 매각하고, 이 과정에서 18억 달러의 손실을 봤다고 발표했다. 이 발표는 고객들의 대규모 예금 인출(뱅크런) 사태로 번졌다.
예금액의 96%가량이 FDIC가 보증하는 예금자 보호 대상이 아니란 점은 뱅크런을 가속했다. 다급해진 예금 고객들은 지난 9일 SVB에서 420억 달러를 하루 만에 찾아갔고, 미 정책당국은 결국 은행 폐쇄·예금 지불정지를 결정했다.
◆당국, 특화은행 대표 사례로 SVB 제시…재점검 이뤄질 듯
SVB 파산은 국내 은행 산업 과점 체제 해소를 위한 금융당국의 특화은행 설립 구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앞서 금융당국은 지난 3일 '제1차 은행권 경영·영업 관행·제도 개선 실무작업반 회의'에서 은행 업무 범위를 세분화한 특화은행 설립을 논의했다. 경쟁자를 시장에 들여 5대 시중은행의 과점 체제를 허물기 위해서다.
특히 회의에서는 특화은행의 대표 예로 미국 서부 스타트업의 돈줄 역할을 하는 SVB를 꼽기도 했다. 금융당국은 미국 SVB를 별도 인가 단위에 따른 특화은행은 아니지만, 사실상 고위험 벤처기업만을 고객으로 상대하는 특화은행처럼 기능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SVB 파산으로 금융당국이 그간 구상한 특화은행 설립 동력이 약화했다. SVB가 급격한 금리 인상 여파로 파산한 터라, 대외 경제 환경 변화에 민감한 국내 금융시장에는 특화은행 모델이 부적합하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향후 관련 논의 테이블에서 SVB 사태도 다뤄질 수 있다"며 "오히려 이번 변수가 여러 방안의 장단점을 더 균형감 있게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재용 기자(jy@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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