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취재팀] TV 휴대폰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의 분야에서 한국 IT·전자산업은 이미 세계 최고 위치에 있다. 미국과 일본의 경쟁 업체와 달리 삼성과 LG 등이 '오너 경영'을 통해 승부처에서 과감하고 신속한 선행 투자를 단행한 결과다. 하지만 앞날이 마냥 보장돼 있는 것은 아니다. 애플 태풍에 거함 노키아가 맥없이 몰락해버린 사례에서 보듯 이 시장은 한 치 앞을 장담할 수 없을 만큼 급변하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 기업은 과거와 전혀 다른 새로운 환경에 처해 있다. 세계 1등을 벤치마킹함으로써 성장하던 과거의 전략이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고 스스로 혁신을 통해 끝없이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 하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아이뉴스24는 창간 12주년을 맞아 한국 IT·전자산업이 새롭게 헤쳐나아갈 방향에 대해 5회에 걸쳐 시리즈로 조명한다.[편집자주]
1)韓 IT·전자산업 '목표 부재 아노미'에 빠졌다
2)韓 스마트폰, 아이폰 잡고 '퍼스트 무버'로
3)세계 TV 시장 '메이드 인 코리아' 굳히기
4)"격차 벌린다"…韓 반도체, 패러다임 변화 주도
5)차세대 디스플레이로 세계 제패 꿈꾼다
"10여년 전 하이닉스를 보는 듯하다."
일본을 대표하는 D램 반도체 기업 엘피다메모리가 법원에 파산보호 신청을 하고 자산을 매각키로 한 가운데, 엘피다 인수전에 SK하이닉스가 제안서를 써낸 것이 알려지자 하이닉스에서 일했던 관계자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엘피다가 매물로 나온 상황이 SK하이닉스의 옛날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는 뜻이다.
SK하이닉스 역시 10여년 전만 하더라도 주인을 찾기 위한 기업 실사 과정에서 주요 경쟁 업체들에 회사를 속속들이 보여주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SK라는 든든한 둥지를 만나고 이제는 역으로 엘피다 인수 제안서를 써낼 수 있게 된 것이 하이닉스로서는 격세지감을 느낄 만하다.
일본에서 기술을 전수받아 왔던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이처럼 주객전도된 상황을 맞이한 것만 봐도, 이제 반도체 시장의 파워가 한국으로 완전히 넘어왔다고 봐도 좋을 듯하다.
실제로 세계 반도체 시장의 역사는 국내 업체들이 메모리반도체 시장에서 기존 강자였던 인텔,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 도시바, 엘피다 등을 제치며 새롭게 써 온 역사나 마찬가지다.
◆메모리반도체선 경쟁자 사실상 없다
시장조사기관 아이서플라이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세계 D램 시장에서 삼성전자는 45%, SK하이닉스는 21.6%의 시장점유율을 기록했다.
특히 모바일 D램 시장에서 삼성전자의 시장점유율은 53.8%, SK하이닉스는 20.8%였다. 한국 기업들이 모바일 D램 시장의 4분의 3을 거머쥐고 있는 것이다. 낸드플래시 시장에서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시장점유율 합은 50%에 이른다.
◇세계 주요 D램 업체들의 지난해 영업이익률
업체 | 삼성전자 | 하이닉스 | 마이크론 | 엘피다 | 이노테라 | 난야 |
연간 영업이익률 | 19.8% | 3.1% | 3.3% | -31.3% | -53.1% | -90.3% |
국내 업체들은 수율 극대화에 따른 원가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모두 생산성 향상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미세공정을 주도하면서 경쟁 업체들의 원가 경쟁력을 압도한다.
덕분에 지난해 D램 가격 폭락으로 세계 반도체 경기가 혹독한 빙하기에 들어섰을 때도 국내 기업들은 건재함을 과시했다.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는 지난해 4분기 25%에 달하는 영업이익률을 기록했으며, SK하이닉스도 분기 적자를 기록하긴 했지만 연간 흑자 기조 유지에 성공했다.
반면, 일본 반도체 시장은 급격한 재편이 한창이다.
엘피다는 매각 절차를 밟고 있고, 르네사스 테크놀로지, 후지쓰, 파나소닉 등 3사도 사업 적자를 면하기 위해 시스템LSI 반도체 사업 부문을 통합하기로 했다. 설계 및 개발만 전문으로 하는 회사를 설립하고, 대신 잉여 설비는 미국 글로벌파운드리에 매각한다.
업계 관계자는 "일본 반도체 기업들의 몰락은 반도체 시장에서 규모의 경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며 "국내 업체들 중심의 반도체 시장 독주 체제는 앞으로도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시스템반도체로 눈돌리는 삼성·하이닉스
물론 한국 반도체가 만능 플레이어는 아니다.
국내 반도체 산업은 아직까지 메모리반도체에 편중돼 있는 구조다. 전체 반도체 시장에서 77%를 차지하는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를 장악하지 못한다면 메모리 분야 1등만으로는 반도체 시장의 선두를 지키기에 한계가 있다.
특히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강점을 보이는 D램의 경우, PC에 가장 많이 들어가는데 최근 몇 년간 소비자들의 관심이 PC 대신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같은 모바일 플랫폼으로 옮겨가면서 급격한 경기 변동에 '쿠션' 역할을 해 줄 만한 또 다른 성장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아지고 있다.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비메모리 반도체를 또 다른 성장축으로 키우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바일 기기 증가에 따라 비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앞으로도 폭발적 성장세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올해 사상 처음으로 비메모리 분야에 전체 반도체 투자액 15조원 중 절반이 넘는 8조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삼성전자는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등의 선전으로 이미 지난해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 10조원 가량의 매출을 거둔 바 있다. SK하이닉스 역시 비메모리 분야에 대한 투자를 늘려 갈 생각이다.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전동수 사장은 최근 "반도체 시장 환경이 메모리에서 시스템반도체 중심으로, PC에서 모바일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반도체 시장의 게임의 룰이 바뀌고 있으며, 그 속에서 종합반도체 회사인 삼성전자에 유리하게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후발업체들과의 격차를 더욱 늘리는 '초격차' 전략을 구사하겠다는 뜻이다. 한국 반도체의 세계적 위상이 새롭게 바뀐 룰 속에서도 여전히 건재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김지연기자 hiim29@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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