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스마트폰 애호가들이 애플에 열광했던 것은 '사각형에 둥근 가장자리'를 특징으로 한 디자인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스마트폰의 용도를 획기적으로 변화시켜 시장 생태계를 바꾸어버린 혁명성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또 그 혁신은 기존 업체들의 많은 선행 기술 때문에 가능했다.
애플은 이미 나와 있는 기술들을 바탕으로 짜깁기를 하되 과거와는 완전히 쓸 모가 다른 제품과 서비스를 창안해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애플의 이런 애플다운 모습을 보기 어려운 것 같다.
시장을 송두리째 흔들 만한 혁신을 뒤로 한 채 과거의 혁신을 기반으로 소송을 통해 경쟁을 제한하려는 모습이 더 부각된다. 더 안타까운 것은 애플이 제기한 소송의 요체가 혁신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앱 생태계와 관련된 것이라기보다 제품의 껍데기 디자인과 몇 가지 잔기술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애플이 각광받았던 혁신의 큰 의미를 오히려 반감시키는 데 더 많은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애플의 달라진 모습을 보고 혁신이 바닥을 드러낸 것 아니냐는 시각도 없지 않다. 이제 더 이상 놀랄 만한 그 무엇이 없지 않겠느냐는 관점이다. 스티브 잡스 사망 후에는 더욱 더 그렇게 보인다. '혁신의 화신'이 사라졌다.
돌이켜보면, 잡스 생전의 애플은 진짜 혁신의 화신이었다. 아이팟과 아이튠스를 시작으로 아이폰과 아이패드와 아이클라우드까지, 그야말로 숨 돌릴 틈이 없었다. 기득권에 안주하며 편안하게 먹고 사는 기존 통신 사업자와 제조업체를 골탕 먹이고 종횡무진하는 모습은 소비자를 위한 혁명군처럼 느껴졌을 정도다.
애플이란 혁명군 앞에 기존 모바일 기기 업체들은 추풍낙엽처럼 나뒹굴었다. 아직도 시장은 그 잔해가 즐비하게 널려 있는 상황이다.
혁신에 김이 빠지기 시작한 것은 아이폰4 발표 이후다. 그후 아이폰4S와 뉴아이패드가 나왔지만 과거처럼 강렬한 반응은 없었다. 그렇게 큰 혁신 없이 주춤거리는 동안 애플은 시장의 주도권을 삼성전자에 빼앗기고 말았다.
전후 양면을 강화유리로 만든 독특한 디자인의 아이폰4 또한 잡스가 격찬할 정도로 애플 특유의 혁신적 감각이 돋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가 디자인과 더불어 이른바 ‘레티나(Retina) 디스플레이’를 이 제품의 최대 특징으로 강조할 때 어쩌면 애플이 축적해온 혁신이 바닥을 드러낸 것일 수도 있겠다.
디스플레이는 애플 스스로 혁신한 공(功)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들은 이 때 무릎을 쳤다고 한다. 애플이 하드웨어를 강조한 순간 크게 고전하던 싸움이 해볼 만한 전쟁으로 변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삼성이 정신을 못 차렸던 건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애플 특유의 ‘창의(創意) 싸움’ 방식 때문이었다. 그런데 애플이 먼저 삼성이 강점을 가진 전쟁 방식으로 바꿔 ‘제조의 싸움’을 걸어온 것이다. 전황(戰況)이 바뀌고 삼성의 전광석화 같은 반격이 시작됐다.
삼성의 예감은 적중했다. 레티나에 앞서서 아몰레드(AMOLED)를 장착한 갤럭시가 아이폰과 비교되고 부각됐다. 특히 애플이 특허 소송을 제기해준 덕분에 갤럭시 시리즈는 국제적인 관심사로 떠올랐다. 소송을 치르는 동안 갤럭시는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불과 1년여 만에 삼성은 애플을 제치고 세계 1위에 올랐다.
애플은 시장 상황이 이렇게 바뀐 뒤에도 삼성을 ‘따라쟁이’라고 비판하며 굳이 외면하는 게 하나 있다. 지금까지 단순하게 디자인을 베낀 ‘짝퉁’이 세계 시장 1위에 오른 적은 없고,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라는 점이다. 디자인은 중요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세계 1위 제품에는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애플은 이를 더 진지하게 고민하고 혁신을 배가해야 했다. 아니면 제조 기반의 삼성이 공세를 취할 것에 대해 미리 대비했어야 했다. 제품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하거나, 신제품 발표 주기를 앞당기는 노력 정도는 해야 했다.
그렇잖고도 1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오만하거나 게으른 것이다.
지금 미국 법원의 배심원들은 ‘사각형에 둥근 가장자리’를 특징으로 한 디자인을 놓고 지적재산권 침해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 골치 아픈 일을 떠맡았다. 너무 복잡하고 애매해 전문가들도 판단하기 쉽지 않은 문제를 비전문가인 배심원이 평결했을 때 과연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게 옳은 것인지도 논란이 될 전망이다.
그런데 미국 배심원 평결이 어떻게 나오든 시장, 즉 소비자는 애플에 우호적인 것만은 아닌 듯하다. 삼성전자를 세계 1위로 만든 소비자 모두가 눈이 멀었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일부는 그럴지도 모르지만, 분기마다 5천만 명이 삼성 제품을 산다면 달리 해석해야 한다. 사야할 이유가 있다고 보는 게 더 합리적이다.
소비자들은 또 애플이 보여준 혁신에 대해 이미 충분한 보상이 이뤄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시가총액이 700조원을 넘고, 세계 휴대폰 시장의 영업이익 가운데 70%를 애플이 독차지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큰 보상인가. 단지 ‘사각형에 둥근 가장자리’ 디자인으로 이런 보상을 챙기는 건 오히려 좀 과분할 수도 있다.
그래서 그 보상은 디자인 차별화에 대한 대가라기보다 앱 생태계로 크게 시장을 혁신한 공에 대한 보답이라 보는 게 더 옳은 판단이다.
그런 이유로 디자인이 강조된 현재 소송은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고 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두 회사나 소비자에게 득이 될 게 별로 없다.
곧 나올 아이폰5를 차분히 지켜봐야겠지만, 애플은 지금 법원 전투에 전력을 다할 게 아니라 시장에서 다시 혁신의 구두끈을 조일 때다.
애플 마니아가 기대하는 것은 소송에서 삼성을 제압하는 게 아니라 혁신의 깃발을 들고 시장을 호령하며 기업의 구태를 격파하는 것이다.
이균성기자 gslee@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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