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수기자] 감기약·해열제 등 가정상비약의 약국외 판매에 또 다시 제동이 걸렸다.
국민들의 편익과 약사들의 이익이 상호 충돌하면서 상비약 약국외 판매는 예측할 수 없는 안개 속으로 치닫고 있다.
당초 가정상비약의 약국외 판매에 반대해 온 대한약사회가 '국민 편익을 외면한 집단이기주의'라는 여론이 거세지자 지난해 12월 가정상비약의 편의점 등 24시간 국민이 접근 가능한 곳에 국한해 판매한다는 방안을 전향적으로 수용한다는 입장을 발표하고 보건복지부와 관련 사안을 논의,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듯 보였다.
하지만 지난달 26일 임시대의원총회에서 '상비약 편의점 판매 협의안'에 대한 표결을 통해 약사회 내부의 거센 반발이 확인됐고, 그동안 상비약 약국외 판매와 관련 정부와의 협의를 주도해 온 김구 회장이 2선으로 물러나게 됐다.
게다가 앞으로 의약품 약국외 판매와 관련한 모든 업무를 맡게 될 비상대책위원회는 약사회에서 소위 '강경파'로 불리는 인사들로 구성될 전망이어서 상비약 약국외 판매는 '이미 물 건너간 게 아니냐'는 우려가 높다.
김 회장은 새 위원장에 민병림 서울지부장과 김현태 경기도지부장을 추천했다. 두 인물은 상비약 슈퍼판매 자체에 맹렬히 반대해온 강경파들이다. 이들이 위원장직을 수락할 경우 약사회 노선은 정부와의 '협의'에서 약국외 판매 '반대'로 일변하게 돼 정부와의 갈등의 골은 한층 더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주무부처인 복지부는 약사회 내부 사정과 관계없이 예정대로 다음달 임시국회에서 약사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고 오는 8월부터 약국외 판매를 시행하겠다는 방침이다. '약국외 판매약'을 신설하는 의약품 3분류 체계로 법 개정을 강행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임채민 복지부 장관 역시 "의사일정만 합의되면 예정대로 2월 임시국회에서 처리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현재 분위기로는 이를 장담하기 어렵다.
우선 상비약 약국외 판매와 관련해 그동안 정부의 대화 창구였던 김 회장이 영향력을 잃게 됨에 따라 복지부와 약사회간 합의가 이루어질지에 대해서 비관적인 전망이 지배적이다.
또 약사회와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사실상 4월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의원들이 거대 이익단체인 약사회 표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점도 이달 국회에서 약사법 개정안 통과에 대한 전망을 불투명하게 하고 있다.
대한약사회는 전국 16개 시·도 지부 산하에 228개 분회와 5개 해외 지부를 두고 있다. 약사 면허 소지자 6만여명 중 3만여명이 회원으로 가입해 있다. 전국적인 조직망뿐 아니라 회원 간 유대도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엇보다 의원들이 약사들 눈치를 보는 이유는 약사들이 지역 주민들과 친밀도가 높은 여론 주도층인데다, 일터인 약국 역시 '동네 사랑방'으로 불릴 만큼 지역별로 거점화됐기 때문에 그들의 표심에 민감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의원들 대다수는 상비약 약국외 판매와 관련해 언급을 꺼리거나 유보 입장을 밝히며 약사들 눈치보기에 여념이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난해 말 국민 여론과 약사회 표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던 복지위 소속 의원들이 결국 전체회의 안건에서 약사법 개정안을 제외했듯이, 이번 임시국회에서도 감기약 등 상비약의 슈퍼판매는 또 다시 국민 편익을 외면한 채 통과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상비약의 약국외 판매는 약국이 문을 닫는 공휴일이나 야간에는 약을 구할 방법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는 국민들의 불편을 개선하기 마련된 조치다.
상비약 약국외 판매는 국민 83%가 원하고 있으며 국민 편익과 국민 건강권이 달린 문제인 만큼 대안이 없는 한 시급히 시행돼야 한다.
정부가 작년 7월 박카스 등 44개 일반의약품을 의약외품으로 전환해 슈퍼 판매를 허용하자 생산량과 판매 장소가 늘고, 소비자들의 접근성도 크게 향상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만큼 국민 편익이 증대됐다는 얘기다.
판매 당사자인 약사들 역시 내부 논리에만 치우치지 말고 폭넓은 이해로 국민 편익을 우선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직역(職域) 이기주의'라는 국민들의 비난을 피하기 힘들 것이다.
특히, 정치권의 소신있는 결단과 분발이 요구된다. 이번에도 국회가 특정 이익단체의 입장만 대변한 채 국민 편익은 안중에도 없다면 국민들의 신뢰를 다시 회복하기 힘들 것이다.
상비약 약국외 판매와 관한 한 고려돼야 할 가장 우선적인 사항은 직역의 이익이 아닌 바로 국민 편익이다.
정기수기자 guyer73@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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